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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1000년 만의 만남, ‘우리는 한 형제’

참 빛 사랑 2016. 2. 19. 16:35



교황과 러시아 정교회 키릴 총대주교, 12일 공동 선언 발표… 두 교회 간 화해의 시대 열어





프란치스코 교황과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가 12일(현지시각)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역사적인 첫 만남을 갖고 두 교회 간 화해와 대화의 시대를 열었다.

이날 회동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1054년 상호 파문하면서 갈라선 이른바 ‘교회 대분열’ 이후 거의 1000년 만에 이뤄진 것으로,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두 수장은 이날 비공개 회담 후 총 30개 항의 공동 선언에 서명했다. 두 수장은 먼저 신앙의 형제로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눈 데 대한 기쁨을 표시하는 한편 인간적 나약함과 죄로 갈라져 사는 잘못에 대해 주님께 용서를 구했다.

이어 “중동과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의 희생물이 되어가고 있다”며 더 이상의 희생을 막아달라고 국제 사회에 호소했다.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범죄는 없다”며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 간 대화와 종교 지도자의 책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신음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새로운 삶을 찾아 떠도는 난민들과도 연대하겠다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서명식에서 “같은 세례를 받은 형제로서 격식을 차리지 않고 대화했다”며 “일치는 앞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중에 이뤄진다”고 말했다.

키릴 총대주교도 “우리는 전쟁에 반대하고, 인간 삶과 교회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날 회동으로 ‘함께 걷게 될’ 앞길이 활짝 트인 것은 아니다. 상대방 신자에 대한 개종 시도나 선교 경쟁을 할 경우 해묵은 갈등이 다시 불거질 수 있다. 두 수장은 이를 의식한 듯 “우리는 형제이지 경쟁자가 아니다”라며 조화로운 공존을 다짐했다.

교황은 이날 멕시코 사목 방문 길에 중남미에 와 있는 키릴 총대주교를 만나러 잠시 쿠바에 내렸다. 교황은 기자들에게 “당대에 완전한 일치는 어렵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가 함께 걷고 있는 모습을 보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그동안 공산 통치 시절에는 박해의 고난 때문에, 이후에는 가톨릭이 정교회 지역에서 개종 활동을 벌인다는 이유를 들어 대화의 장에 나오지 않았다.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위원장 김희중 대주교는 “역대 교황님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만나 공감대를 이뤄왔지만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와의 만남은 여태껏 성사되지 못했다”면서 첫 만남의 의의를 설명하고, 화기애애했던 이번 만남을 계기로 가톨릭과 러시아 정교회의 교류가 활발해지기를 기대했다.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총무 신정훈 신부는 “전 세계 독립 정교회 가운데 가장 큰 러시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제3의 로마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을 만큼 자부심이 대단하다”며 “처음으로 만났다는 것은 물론 교황님과 총대주교가 교회 현안에 공감대를 이뤄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는 것에도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1000년 만의 만남… 문답으로 알아보는 동방 정교회


▲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사도 베드로(왼쪽)와 동방교회를 대표하는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상봉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콘화. 동서방 교회의 일치 염원이 담겨 있는 성화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러시아 정교회 키릴 총대주교의 12일 첫 회동에 ‘1000년 만의 상봉’이란 수식어가 붙으면서 동방 정교회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가톨릭과 쌍둥이라고 불리는 동방 정교회에 대해 알아본다.



Q: 동방 정교회란

A:
1054년 교회 대분열 때 서방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동로마제국 지역을 비롯한 동방의 모든 교회를 말한다. 4세기 이래로 지중해 주변 그리스도교 세계는 로마ㆍ콘스탄티노플(터키 이스탄불)ㆍ알렉산드리아(이집트)ㆍ안티오키아(시리아)ㆍ예루살렘(이스라엘) 등 5개 도시의 총대주교(Patriarch)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안티오키아ㆍ예루살렘ㆍ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 세계로 편입된 이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만이 양대 축으로 존재했다. 그러다 찬란한 비잔티움 문화를 꽃피웠던 콘스탄티노플마저 1453년 오스만튀르크(이슬람)에 의해 함락되면서 입지가 더 축소됐다. 이후 러시아가 ‘제3의 로마’를 표방하고 동방 정교회 맹주로 나섰다.



Q: 동방과 서방 교회는 언제, 왜 갈라졌나

A:
분열의 씨앗은 이미 로마제국 시대에 뿌려졌다고 봐야 한다. 395년 동(그리스어 문화권)과 서(라틴어 문화권)로 갈라지기 전부터 언어적, 문화적으로 이질감을 보였다. 6세기 말부터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발칸반도에 진출하고, 이슬람이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교류가 점점 어려워졌다.

가시적 균열은 8세기 성화상 파괴 논쟁에서 비롯됐다. 비잔티움 황제가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성화상을 파괴하자 교황이 이를 정죄하면서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필리오퀘(filioque, ‘아들로부터’) 논쟁이 있다. 서방 교회는 성령이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로부터도 나온다고 믿었지만, 동방 교회는 성령은 오직 성부로부터만 나온다고 주장했다. 성찬식 빵에 누룩을 넣고 빼는 문제, 불가리아 선교 주도권, 로마 교황의 수위권 인정 등을 둘러싸고도 마찰을 빚었다.

나아가 11세기 비잔티움 영토였던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한 프랑스 북부 노르만족이 그곳에서 서방교회 관습을 강요하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관할 구역에 있는 서방 교회를 폐쇄하는 조치로 맞섰다.

사태 수습을 위해 파견된 교황 사절단과 총대주교 사이에 대화가 결렬되자 교황 사절들은 하기아 소피아성당 제단에 총대주교 파문 교서를 던져놓고 떠났다. 총대주교도 상대방을 파문으로 것으로 대응하면서 분열을 기정사실화 했다. 설상가상으로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대가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는 바람에 사태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Q: 교리와 예식 차이는

A:
동방 정교회도 일곱 성사를 보존하고 있다. 주교와 수도원 제도, 성인 공경과 성호 긋기 전통도 그대로 유지한다. 그러나 교황 수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 서양 음력이라 할 수 있는 율리우스력을 쓰는 교회가 많아 예수 부활 대축일 등 주요 전례력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성탄 대축일은 1월 7일. 또 무반주로 찬송하고, 회중석 없이 서서 예식을 거행한다.



Q: 동방 정교회 분포와 조직은

A:
러시아,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정교회가 대표적이다. 러시아 정교회 신자 수는 1억 6000만 명으로 세계 동방 정교회 신자 2억 5000만 명의 절반이 넘는다. 가톨릭처럼 교황을 정점으로 한 통일된 조직은 갖추고 있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모든 교회의 총대주교(Ecumenical Patriarch)’라는 칭호를 붙인다.

이집트 콥트교회나 아르메니아교회는 동방 정교회와는 다른 별개 조직으로 봐야 한다. 시리아 야코부스교회, 에티오피아교회, 인도 말라바르교회 등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토착화된 이런 교회들은 사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뿌리가 깊고, 독자적 전례를 갖고 있다. 이들 교회는 흔히 오리엔트 정교회 또는 동방 독립교회라고 불린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 결별의 현장에서 영국 주교회의 의장·

성공회 합동기도회

헨리 8세 영국 국왕이 자신의 이혼을 불허하는 교황청에 반발해 1534년 가톨릭과 결별을 선언하고 국교회(성공회)를 탄생시킨 역사적 장소에서 가톨릭 고위 성직자가 기도회를 주관해 화제가 되고 있다.

영국 가톨릭 주교회의 의장 빈센트 니콜라스 추기경은 9일 런던 햄프턴 궁전에 있는 헨리 8세 경당에서 성공회 성직자들과 함께 기도회를 가졌다. 기도회는 양 교회가 종교 분열 이전의 전통을 공유하려는 듯 라틴어 성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가톨릭과 성공회의 만남은 새로울 게 없지만, 이날 행사는 장소가 갖는 상징성 때문에 이목을 끌었다.

앤 블린이라는 처녀와 사랑에 빠진 헨리 8세는 스페인 출신의 캐서린 왕비와 이혼을 결심했으나 교황청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합동 기도회가 열린 바로 그곳에서 자신이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임을 공표하는 법을 통과시키고 로마와 관계를 단절했다.

이후 여왕이 된 캐서린의 딸 메리가 영국을 가톨릭 신앙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피의 숙청도 서슴지 않는 바람에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오명을 얻었다. 메리가 죽은 이후 성공회는 줄곧 독자적 길을 걸어왔다. 성공회 제도와 예식은 가톨릭과 흡사하나 신학적 노선은 온건한 칼뱅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최근 두 교회는 다양한 측면에서 관계 회복을 꾀하고 있다. 한목소리로 정부의 동성애 허용에 반대하고, 개종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왕족과 가톨릭 신자 간 혼인 금지 조항 철폐를 이끌어냈다. 이 때문에 일부 보수 언론은 “헨리 8세가 무덤에서 탄식한다”는 등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