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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오타 줄리아 친필 서한 최초 공개

참 빛 사랑 2023. 6. 4. 17:55
 
오타 줄리아가 1609년 8월 19일 남동생 무라타 야스마사에게 보낸 친필 편지. 일본 하기박물관 제공


“제 남동생은 손에 푸른 멍이, 발에는 적갈색 멍이 있습니다. 당신도 같은 부위에 멍이 있나요? 부디 대답해 주세요…. 우리 형제 중 당신만큼은 부모님과 함께 피신했을 거로 생각했는데, 저와 마찬가지로 이 나라에 끌려와 있을 줄이야….”

전쟁통에 생이별한 남동생을 타국에서 수소문해 찾는 절절한 마음이 와 닿는다. 기쁨과 그리움, 슬픔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 편지를 쓴 주인공은 ‘오타 줄리아(율리아)’.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가톨릭 세례를 받은 조선인 여성으로, 외딴 섬에 유배당하면서도 배교를 거부하고 평생 굳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 아직 복자나 성인품에 오르진 않았지만, 한국과 일본 양국 신자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는 인물이다. 

그가 친필로 쓴 편지 3통이 일본 하기박물관(야마구치현 하기시 소재)에서 최초로 공개됐다. 본지가 옛 일본어로 쓰인 편지 일부 사진과 현대어 번역본을 입수했다. 1609년 8월 19일 하기에서 하층민으로 살던 남동생(일본명 무라타 야스마사)에게 보낸 첫 편지다. 
 
이시다 미치코(石田道子)씨가 그린 오타 줄리아 초상화. 일본 고즈시마섬 '오타 줄리아 현창회'에 기증됐다.



오타 줄리아의 이름·출신 배경 드디어 밝혀져

이번에 공개된 편지는 한국과 일본 그리스도교 사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간 추측이 무성했던 줄리아의 이름과 출신 배경을 직접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줄리아가 왕족인 전주 이씨라는 설이 제기됐지만,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김씨 양반가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성(서울)에서 ‘제운대군절도사(濟運大軍節度使)’로 불린 왕의 측근 김세왕온(金世王温)과 부인 홍씨 사이 5자녀 중 장녀”라고 소개한 것이다. 한편, 국내 사료에는 ‘제운대군절도사’와 ‘김세왕온’이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어 교차 검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아울러 줄리아는 자신을 ‘타아(たあ)’라고 밝히며 임진년(1592년) 당시 13살이었다고 말한다. 기존에 이름으로 알려진 ‘오타’의 ‘오’는 귀부인에게 붙이던 높임말 ‘오(御)’였던 것이다. 즉 '오타'가 아닌, ‘타아’가 더 맞는 이름인 셈이다. 물론 아직 정확한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줄리아’ 혹은 ‘쥬리아’는 세례명인 율리아의 일본식 발음이다.

또한, 줄리아는 편지 수신자를 본인과 7살 터울인 둘째 남동생 ‘운나키(うんなき)’라고 지칭한다. 정황상 ‘타아’와 ‘운나키’는 조선에서부터 쓰던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운나키’의 경우, ‘운락(운낙)’이나 ‘운악’·‘운학’ 혹은 ‘응락’ 등을 말하는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일본 그리스도교 사학자 아사미 마사카즈(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교수는 “그간 줄리아에 대한 기록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사료에 단편적으로 나온 게 전부였다”며 “친필 편지는 그의 입을 통해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는 무척 귀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이어 “줄리아가 고귀한 신분 출신이란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며 “그가 전쟁으로 헤어진 친동생을 실제로 만난 경위도 판명됐다”고 전했다. 
 
일본 하기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오타 줄리아 친필 서한 안내판. '조선에서 생이별한 남매, 일본에서 기적의 재회'라고 붉은 글씨로 적혀 있다. 하기박물관 제공.



눈물겨운 남매 상봉…편지는 남동생 가문이 보관

임진왜란 발발 당시 줄리아 남매를 비롯한 김씨 일가는 일본군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줄리아는 편지에서 자신이 “1593년 한성에서 또 다른 11살짜리 동생, 몸종과 함께 붙잡혔다”고 전한다.

일본으로 끌려간 그는 조선 침공 선봉장이자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아우구스티노)의 영지에서 그 부인의 시녀로 살게 된다. 그리고 1596년 예수회 모레혼 신부에게 ‘줄리아(율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고니시가 패배해 멸문당하자 줄리아는 승자이자 일본의 새 통치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겨진다. 

이에야스의 눈에 들어 그의 거처인 시즈오카 슨푸성에 살며 일본 각지 소식을 접하던 줄리아. 어느 날 그는 귀를 의심케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야마구치 일대를 지배하는 모리 가문의 가신, 히라가 가문에 자신의 남동생과 닮은 조선인 포로가 있다는 것.

줄리아는 편지에서 “당신이 머무는 가문의 사람이 고려(조선)에 있을 적 당신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제 남동생이 맞는다고 생각했다”며 “일본에 와있으리라 생각 못 해 그동안 찾지 않았다. 제 동생이 맞는다면 20일 정도 여유를 갖고 슨푸성으로 와달라”고 다급히 요청한다. 

편지를 받은 남동생은 다행히 슨푸성을 찾아가 누나 줄리아와 상봉했다고 전한다. 또 이에야스도 만나 그가 입던 기모노, 즉 ‘고소데(小袖, 일본 전통 의상에서 소맷부리가 좁은 옷)’와 칼·말 등을 하사받은 뒤 하기로 돌아갔다. 이에야스의 호감을 산 남동생에게 모리 가문은 ‘무라타(村田)’라는 성과 봉토(쌀 생산량 200석 규모)를 수여했다. 그렇게 조선인 포로 ‘운나키’는 일본 무사 ‘무라타 야스마사(村田安政)’가 됐다.

이후 무라타 가문은 하기에 터를 잡고 무사로 살았다. 줄리아가 쓴 편지 3통과 이에야스가 하사한 기모노도 대를 이어 소중히 보관해왔다. 그러던 중 최근 야스마사의 직계후손인 노리오씨(1941년생)가 하기박물관에 기증하면서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타 줄리아의 남동생 무라타 야스마사에게 하사한 기모노(고소데). 일본 하기박물관 제공.



베일에 싸인 오타 줄리아의 말년도 상상 가능

친필 편지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한 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이세훈(토마스 아퀴나스) 박사는 “품위 있는 양반 출신으로 한자를 터득하고, 일본어도 아는 줄리아는 신앙을 굳게 지키며 선교사들에게 큰 도움을 줬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줄리아가 신앙심 깊고 모범적인 가톨릭 신자로서 가난한 교우들에게 옷과 음식 등을 나눠주고, 자주 고해성사를 봤다는 내용이 선교사들 편지에 나온다. 

동정과 신앙을 지키고자 이에야스의 수청도, 그리스도교 배교도 거부하던 줄리아는 결국 1612년 유배를 당하게 된다. 그가 몇 개 섬을 거쳐 종착한 곳은 도쿄도에 소재한 낙도, 고즈시마섬이었다. 줄리아는 유배지에서도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만큼, 가지고 간 십자가 앞에서 자주 기도했다. 세례를 준 모레혼 신부에게 편지로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는 그림과 종을 요청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과거 줄리아가 고즈시마섬에서 40년간 살다 결국 삶을 마감했다는 구전이 정설처럼 여겨질 때가 있었다. 섬에는 주민들이 줄리아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무덤도 존재한다. 그러나 훗날 알려진 예수회 선교사들의 편지를 보면, 줄리아는 1616년 이에야스 사후 유배에서 풀려나 각지에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오타 줄리아의 유배지인 일본 고즈시마섬 아리마 전망대에 있는 '줄리아의 십자가'. 출처 고즈시마무라(神津島村) 사무소 홈페이지.

그는 1619년 나가사키에 머물며 여자 어린이들에게 교리와 성가를 가르치다 추방당하는 등, 가난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복음 전파에 힘썼다. 줄리아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1622년 예수회 일본관구장 파체코 신부가 쓴 편지로, ‘오사카에서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지내고 있다’고 쓰여 있다. 

이세훈 박사는 “친필 편지가 줄리아의 말년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남동생 야스마사가 있는 하기로 가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 그러면서 “일본 교회사 속 조선인 신자들은 우리와 무관하다 볼 수 없다”며 “이번 편지 공개를 계기로 일본에서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조선인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연구도 더 다양하게 이뤄지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오타 줄리아의 친필 편지는 일본 하기박물관(萩博物館)에서 6월 18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